우주를 보는 서로 다른 두 관점—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 속 물리학

 

연초에 개봉한 영화 《컨택트》 (원제: Arrival)는 영화관을 나오고도 한동안 그 내용을 머릿속에서 곱씹어보게될 정도로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컨택트》는 외계인과의 조우를 다룬 전형적인 할리우드식 블록버스터이기를 거부한다. 반면 《인디펜던스 데이》나 《우주 전쟁》과 같은 영화를 기대했다면 조금은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다. 이들 영화가 인류에 적대적인 외계인의 침공을 다루었다면, 《컨택트》는 우주에 대한 서로 다른 두 관점을 지닌 외계인과의 소통을 주제로 삼고 있다.

사실 이 영화는 필자가 하드 SF 소설에 흥미를 가지게 되는 가장 큰 계기가 되었는데, 영화를 보고 바로 얼마 후 인터넷 서점에서 원작 소설인 〈네 인생의 이야기〉 (원제: Story of Your Life)를 담고 있는 중단편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원제: Stories of Your Life and Others)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특히 작가 테드 창은 정말 독특한 이력을 가져, 잠깐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브라운 대학교에서 물리학과 컴퓨터 공학을 전공한 그는 1990년에 단편 〈바빌론의 탑〉으로 등단을 하는데, 이 작품으로 그는 저명한 SF 문학상인 네뷸러상을 최연소로 수상하게 된다. 이후 그는 발표하는 작품마다 각종 상을 휩쓸며 주목을 받고, ‘전 세계 과학소설계의 보물’이라는 찬사를 받게 된다. 하지만 가장 특이한 점은, 이런 그가 발표한 작품은 지금까지 중단편 15편뿐이라는 것이다. 그의 작품집은 〈당신 인생의 이야기〉가 유일할 정도로 그 수가 적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는 다음의 총 여덟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바빌론의 탑〉, 〈이해〉, 〈영으로 나누면〉, 〈네 인생의 이야기〉, 〈일흔두 글자〉, 〈인류 과학의 진화〉, 〈지옥은 신의 부재〉, 그리고 〈외모 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다큐멘터리〉. 이 중 필자는 〈네 인생의 이야기〉와 〈바빌론의 탑〉, 그리고 〈지옥은 신의 부재〉를 가장 흥미롭게 읽었다. 특히 〈바빌론의 탑〉에서 생생하게 묘사되는 이질적이면서도 사실적인 세계관이 인상깊었다. 〈지옥은 신의 부재〉는 종교적인 소재를 다루면서도 굉장히 과학적으로 지옥, 현세, 그리고 천국을 소개하고, 천사의 강림을 독창적으로 해석한 것이 참신하였다. 한 작품을 마칠 때마다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기회가 되면 단편집에 담긴 다른 소설들도 소개하고 싶다. 여기서는 단편집에 담긴 여러 훌륭한 작품들 중 〈네 인생의 이야기〉의 줄거리와 더불어 과학적인 배경을 다루려고 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원인과 결과, 즉 인과론적인 관점으로 우주를 바라본다. 유리잔을 던지는 행위를 취하면, 유리잔이 깨지는 결과가 따라올 것이다. 공을 언덕의 경사면에 놓으면 중력에 의해 굴러내려올 것이다. 과학에 큰 관심이 없더라도, 라는 공식은 누구나 한 번쯤 보거나 들어보았을 것이다. 바로 뉴턴의 운동 제2법칙이다. 사실 좀 더 물리적인 의미를 가지는 식의 형태는 바로 이다. 여기서 는 가속도, 는 힘, 은 질량인데, “어떤 질량 인 물체에 힘 를 가하면(우변), 물체는 가속도 로 가속한다(좌변)”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식의 우변은 원인, 좌변은 결과를 나타낸다. 이것은 모든 사건에는 원인이 있고, 그것에 따라서 결과가 발생한다는,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는 지극히 직관적인 관점과 상통하는 것이다.

나아가 사람들이 서로 사회적인 상호 작용을 하면서 인간 관계를 만드는 것도 인과론적으로 볼 수 있다. 타인에게 어떤 행동을 하는지, 어떻게 대화를 하는지가 그 사람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동력이 된다. 인간 관계에 있어서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결과는 확연히 달라진다. 이것은 모두 인간이 시간의 축에 종속되어 미래에 대한 정보를 알지 못한다는 것에서 연유된다. 인간은 미래가 불확정적이라고 인식하며, 그것이 바로 원인과 결과에 대한 관점의 핵심이다. 인과론의 전제는 원인에 대한 자유도가 서로 다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에 있다. 〈네 인생의 이야기〉는 이 관점에 질문을 던진다. 과연 인과론이 우주를 서술하는 유일한 관점인가?

그렇다면 인과론에 배치되는 관점은 무엇인가? 일단 위에서 언급한 를 상기시켜보자. 를 뉴턴의 제2법칙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제1법칙도 있을 것이다. 사실 뉴턴의 운동 법칙에는 총 세 개가 있다. 제1법칙은 ‘관성의 법칙’이다. ‘관성의 법칙’은 어떤 물체에 힘을 가하지 않는다면 운동 상태를 계속 유지한다는 것을 말한다. 제3법칙은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으로, 어떤 물체에 힘을 가하면 물체도 똑같은 크기를 가지는 힘을 반대 방향으로 힘을 가한 주체에게 가한다는 내용이다. 여튼 이 세 법칙을 기반으로 우리 우주의 역학 체계를 설명할 수 있는데—고전적으로는—, 이렇게 구축된 역학 체계를 뉴턴 역학이라고 한다. 뉴턴 역학은 앞서 말했듯이 자연을 인과적으로 서술하는 역학 체계이다. 그러나 물리학적으로는 이 인과론적인 역학 체계와 동치인 다른 역학 체계들이 있음이 알려져 있는데, 바로 라그랑주 역학이다.

라그랑주 역학은 우리 우주를 뉴턴 역학과는 사뭇 다르게 바라본다. 간단히 말해 라그랑주 역학은 물체가 라그랑지안이라는 물리량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운동한다고 설명한다. 잠시 라그랑지안이 무엇인지 살펴보자면, 운동 에너지에서 위치 에너지를 뺀 값으로, 로 표현된다. 조금 복잡해보이는가? 더 나가보자. 라그랑주 역학의 핵심 아이디어는 바로 해밀턴 원리, 혹은 최소 작용의 원리이다. 사실 ‘작용’이라는 것도 다음과 같은 물리량으로 정해진다:

라그랑주 역학은 위의 작용을 변분이라는 연산을 통해 최소화시키는 조건을 찾아내며, 이를 통해 운동 방정식을 이끌어낸다. 이렇게 얻은 운동 방정식은 실제로 뉴턴 역학을 통해 얻어낸 그것과 완벽히 일치한다. 다시 말해, 두 역학 체계는 동치라는 것이다. 굳이 위에서 수식을 언급한 이유는, 이 라그랑주 역학이라는 것이 전혀 간단한 체계가 아님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이다—물리학에 친숙한 독자들을 제외하면. 비록 그 착상은 놀라울만큼 단순하다: 운동은 어떤 물리량 작용을 최소로 유지하며 움직인다. 이것이 바로 최소 작용의 원리로, 운동은 자연의 내재적인 목적을 달성시키기 위해 진행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조금 복잡하게 느껴진다면, 더 간단하게는 소설 속에서도 언급되는 페르마의 최소 시간 원리를 예시로 들 수 있다. 빛은 서로 다른 두 매질을 통과할 때 그 경계면에서 굴절률에 따라 꺾인다. 단순히 생각해보면 두 점을 잇는 최단 경로를 지날 것 같지만, 빛은 스넬의 법칙에 따라 속도가 변화하여 다른 경로로 이동하게 된다. 한편 이 경로는 이동 시간을 최소화하는 경로에 해당한다. 어떻게 보면 빛은 이동을 하기 전에 시간이 최소가 되는 경로를 미리 알고 이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페르마의 최소 시간 원리로, 빛은 시간을 최소화하는 경로를 통해 이동한다는 내용이다. 다르게 말해서 빛은 ‘이동 시간’이라는 값을 최소화하는 목적을 띤다. 라그랑주 역학은 이를 확장하여 목적론적인 관점을 역학 체계에 적용한다.

시간 종속적인 뉴턴 역학의 관점과 운동 그 자체를 조명하는 라그랑주 역학. 상충될 것만 같은 두 관점이, 같은 우주를 서술하는 서로 다른 방식이라는 것은 상당히 역설적이다. 인간은 어떤 행위를 하기 전에 그것이 어떤 결과를 불러 일으킬지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라그랑주 역학은 인간의 인식과 상당히 동떨어졌다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라그랑주 역학은, 예를 들자면, 인간은 공공의 선을 최대화하기 위한 목적을 지니고 정해진대로 행동한다는 해석만큼이나 비상식적인 해석이다. 간단히는, 위에서 언급한 라그랑주 역학에 관한 수식들과 뉴턴 역학을 비교해보라! 그런데 과연 이것이 인간만의 상식이라면? 우주 어딘가에 있는 다른 외계 종족은 인과론이 아닌 목적론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다면?

〈네 인생의 이야기〉는 목적론적인 관점을 상식으로 취하는 외계 종족인 헵타포드의 언어를 해석하며 관점, 나아가 사고 방식이 변화하게 되는 언어학자 루이즈의 이야기를 다룬다. 헵타포드의 언어는 인간의 언어처럼 시간 종속적이지 않은데, 루이즈는 이들의 언어를 해석하며 헵타포드의 사고를 체득하게 된다—언어를 통해 사고가 바뀐다는 설정은 언어적 상대성, 혹은 사피어-워프 가설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한다. 이들의 관점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된 루이즈는 미래를 ‘기억’할 수 있게 되다. 소설은 루이즈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딸에게 헵타포드가 지구에 방문한 일, 그녀가 그들의 언어를 해석한 것과 딸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 2인칭으로 이야기해주는 형식이다. 그녀의 딸의 이야기가 바로 소설의 제목, 네 인생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녀는 딸에게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 기억해”로 문장을 구성할 뿐만이 아니라, 그녀에게 일어날 일들을 “…할 것이야”가 아닌 “…해”로 설명한다. 이는 미래에 일어날 사건을 현재 시제로 표현하여, 예측이 아니라 마치 자연의 불변하는 법칙을 언급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녀에게, 그리고 헵타포드에게 우리 우주는 이미 정해진 미래를 가지고 있으며, 그들은 이미 주어진 사건들을 수행하며 운명을 따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언어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인간의 시점에서 보았을 때 ‘결과’가 정해져 있으면 의사소통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언어는 수행문의 성격을 띤다. 언어를 통해 자신의 생각의 행위를 전달함으로써 미래를 실현하는 것이다. 대화를 하기 전에 이미 그들은 내용을 알고 있지만, 그것이 참이 되기 위해서는 그 대화가 직접 행해져야만 한다.

이런 배경에서, 〈네 인생의 이야기〉에서 가장 마음이 아프고 곱씹게 되는 내용은 루이즈의 딸이 젊은 나이에 사고를 당해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과, 루이즈는 그 사실을 딸이 태어나기도 전에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단순히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을 넘어 ‘기억’하고 있기에, 그 고통스러운 사건을 이미 경험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루이즈는 이 비극적인 미래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 그녀는 마치 빛이 이동 시간을 최소화하는 경로 상에서 나아가는 것처럼, 정해진 인생을 실현하기 위해 운명을 수행한다. 어떻게 보면 루이즈와 헵타포드는 속박된 기계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루이즈는 이들에게 있어서 연대기를 실현시키는 것 자체가 바로 동기라고 한다. 이들에게 있어서 자유는 무의미하지만, 그렇다고 이돌의 삶이 강제적인 것은 아니다.

〈네 인생의 이야기〉는 구체적으로는 딸의 비극적인 인생을 포함한 자신의 삶 전체를 동시적으로 경험하게된 루이즈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는 모든 사람들의 인생에 대한 은유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흔히 미래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며,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인과의 관점을 지닌 우리는 당장 내일조차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알 방도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는 떠내보낼 수 밖에 없는 인연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마주치게될 무수한 슬픔들, 그리고 결국은 직면하게될 죽음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힘든 결정들을 내리고, 그 끝을 알고 있는 인생의 하루하루를 헤쳐간다. 비록 인간이 모든 사건들을 동시적으로 경험하는 헵타포드는 아닐지라도,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닌 ‘과정’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